TV 예능에서 누가 크게 실수하는 장면이 나오면 화면을 못 보고 고개를 돌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흔히 말하는 공감성 수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도 유독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10월 27일) 신경과학 학술지 Cerebral Cortex에 바로 이 장면을 다룬 연구가 실렸습니다.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남이 망신당하는 순간 뇌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한다는 내용입니다. 핀란드 알토대학교를 중심으로 헬싱키대, 투르쿠대 등 여러 대학이 함께 진행한 연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르시시즘은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이 연구는 환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실제로 정신과 진단이 있는 사람은 참여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특별하다는 생각, 주목받고 싶은 마음, 대접받아야 한다는 느낌 같은 성향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는데, 그 정도가 유난히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비교한 겁니다. 그중에서도 자신감 넘치고 과시적인 쪽, 이른바 '과대형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실험은 이렇게 진행됐습니다
연구팀은 먼저 935명에게 온라인으로 나르시시즘 성향 설문을 받았습니다. 그중 점수가 상위권인 사람들과 하위권인 사람들을 골라 MRI 촬영에 초대했습니다. 촬영 중에 머리를 많이 움직인 사람을 빼고 나니 최종 분석 인원은 성향이 높은 그룹 28명, 낮은 그룹 30명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MRI 안에서 영상을 봤습니다. 영상 속 인물은 학창 시절이나 최근에 칭찬받았던 일, 혹은 따돌림당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는 전문 배우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등장해 피드백을 주는데, 이 피드백이 꽤 아픕니다. 칭찬받았다는 이야기에는 정말 그럴 자격이 있었는지 의심하고, 따돌림당했다는 이야기에는 본인이 원인을 제공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참가자들에게 "공감해 보세요" 같은 지시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받는 피드백을 보라고만 했습니다.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감정 표정 사진을 보여주고 공감하라고 지시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생활에 훨씬 가까운 상황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한 겁니다.
이 실험의 배경에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체면' 개념이 있습니다. 고프먼은 사람들이 대화할 때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려 하고, 그 이미지가 무너지면 당사자뿐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같이 민망해진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체면을 함께 지켜주려 한다는 거죠. 연구팀은 나르시시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이 '함께 민망해지는'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던 겁니다.
뇌가 얼마나 비슷하게 움직이는지를 봤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쓴 분석 방법도 흥미롭습니다. 특정 부위가 얼마나 활발한지를 보는 게 아니라, 같은 영상을 볼 때 사람들의 뇌가 시간에 따라 얼마나 비슷하게 오르내리는지를 비교했습니다.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같은 장면에 동시에 웃고 동시에 움찔하는 것처럼, 같은 걸 비슷하게 받아들이면 뇌 활동의 흐름도 비슷해진다는 원리입니다.
결과: 성향이 높은 사람들의 뇌는 제각각이었습니다
남이 면박당하는 장면을 볼 때, 나르시시즘 성향이 낮은 사람들의 뇌는 서로 꽤 비슷하게 반응했습니다. 반면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서로 비슷하지 않고 제각각이었습니다.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 곳은 두 영역이었습니다. 하나는 이마 쪽 바깥에 있는 배외측 전전두엽으로,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뇌 안쪽 뒤편의 후방 대상피질로, 다른 사람의 상황을 내 경험에 비춰 이해하는 데 관여합니다. 둘 다 '머리로 하는 공감', 즉 인지적 공감과 관련된 곳입니다.
반대로 남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정서적 공감과 관련된 섬엽에서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구팀도 이건 예상 밖이었다고 밝혔는데, 차이가 나기 직전까지는 갔다고 합니다.
설문 결과도 같은 방향이었습니다. 성향이 높은 그룹은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경향 모두 스스로 낮게 답했습니다.
뇌가 덜 일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입니다. 같은 영역의 활동량 자체를 비교했을 때는 두 그룹 사이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성향이 높은 사람들이 아예 무관심했다기보다는,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각자 다른 곳에 주목하고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연구에 참여한 피스파넨 연구원도 이들이 상황에 맞춰 반응하는 방식, 주의를 기울이는 지점,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논문에서는 이들이 면박당하는 사람보다 면박을 주는 사람 쪽에 더 감정을 이입했을 가능성도 언급합니다.
기존 연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공감 능력 테스트를 시키면 다른 사람들만큼 잘 해낸다고 합니다.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평소에 굳이 그 능력을 쓰려는 동기가 약하다는 해석입니다. 또 본인이 따돌림을 당할 때는 뇌가 오히려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자기 상처에는 민감하지만 남의 상처에는 덜 맞춰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영상 속 인물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장면에서는 두 그룹 차이가 없었습니다. 차이는 누군가의 체면이 깎이는 순간에만 나타났습니다.
감안해야 할 점
연구팀이 직접 밝힌 한계도 적어둡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대학을 통해 모집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여성이 70% 정도였습니다. 처음 촬영한 73명 중 15명이 머리 움직임 때문에 제외됐고, 일부 결과는 엄격한 통계 보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또 뇌 반응이 제각각이라는 것이 꼭 공감이 부족하다는 뜻만은 아니고, 주의력 차이나 단순히 몰입을 덜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과시형이 아닌 '취약형 나르시시즘'도 영향을 줬는지는 이번 설계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읽고 나서 든 생각
같은 장면을 함께 보고도 누군가는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은 데에는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구팀은 이런 차이가 진심 어린 관계를 맺기 어렵게 만들고, 대화 중에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르시시즘을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보기보다, 같은 상황을 다른 렌즈로 보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차이가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요.
원문: Piispanen M, Tuominen J, Wuolio M, et al. (2026). Reduced social brain coupling to others’ face threats in narcissism. Cerebral Cortex 36: bhag175.
https://doi.org/10.1093/cercor/bhag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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